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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목포지회와 해방 이후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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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석방된 이후 1927년까지 장병준은 표면적으로는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장산도에 학교 설립을 추진하거나 하의도 농민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방하는 정도의 활동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면에서 장병준, 서태석, 표성천, 박복영 등 오늘날 신안군 도서 지역 출신의 민족운동가들이 장산도, 암태도, 자은도 및 목포 등에서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운동 네트워크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1921년 먼저 석방된 서태석은 서울청년회 계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당시 서울청년회의 핵심인 김사국은 보성학교 출신으로 1919년 서울 국민대회의 주도자였고, 1919년 당시 메이지대학 재학생으로 국민대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이춘균(李春均) 또한 서울청년회계의 중심 인물이었다. 서태석이 서울청년회 계와 연결할 수 있었던 것도, 장병준과 함께 싸웠던 경력 덕분일 것이다. 1923년 서태석은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하고 암태도 소작쟁의를 이끌었다. 


역시 1921년 석방된 표성천도 고향인 자은도 소작인회의 중심인물로 1926년 소작쟁의를 주도하여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렀다. 또 장병준은 송내호가 조직한 독립운동 비밀결사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에 참여했고 소안학교 사건으로 송내호가 구속되자 목포에서 후원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지역의 민족운동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1922년 석방된 이후 1927년까지 장병준은 표면적으로는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장산도에 학교 설립을 추진하거나 하의도 농민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방하는 정도의 활동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면에서 장병준, 서태석, 표성천, 박복영 등 오늘날 신안군 도서 지역 출신의 민족운동가들이 장산도, 암태도, 자은도 및 목포 등에서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운동 네트워크를 형성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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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먼저 석방된 서태석은 서울청년회 계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당시 서울청년회의 핵심인 김사국은 보성학교 출신으로 1919년 서울 국민대회의 주도자였고, 1919년 당시 메이지대학 재학생으로 국민대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이춘균(李春均) 또한 서울청년회계의 중심 인물이었다. 서태석이 서울청년회 계와 연결할 수 있었던 것도, 장병준과 함께 싸웠던 경력 덕분일 것이다. 1923년 서태석은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하고 암태도 소작쟁의를 이끌었다. 역시 1921년 석방된 표성천도 고향인 자은도 소작인회의 중심인물로 1926년 소작쟁의를 주도하여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렀다. 또 장병준은 송내호가 조직한 독립운동 비밀결사 수의위친계(守義爲親契)에 참여했고 소안학교 사건으로 송내호가 구속되자 목포에서 후원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지역의 민족운동과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장병준이 다시 지역 사회운동의 중심으로 부상된 것은 1927년 신간회 목포지회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좌우를 망라한 민족 통일 전선인 신간회에, 초기 임시 정부 통합 운동의 중심이었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자 모두에게 신망이 있었던 장병준은 중요한 임무를 맡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춘숙이 신간회 경성지회 총무와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고 1920년 3. 1운동 1주년 기념 투쟁에 참여했던 박기영이 신간회 남원지회장이 되는 등 장병준과 친밀한 인물들이 대거 신간회에 참여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신간회 목포지회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27년 6월 결성되었다. 목포가 전남 지역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근대 도시 목포와 주변 도서 지역에서 사회운동 네트워크가 활발히 연결되고 있었던 것도 중요한 이유다. 장병준은 신간회 목포 지회의 조사부 총간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직후인 8월 목포청년회 주최 소년남녀웅변대회에서 사복 차림으로 감시 중이던 일본인 경찰이 웅변 중이던 연사 서광언을 난타하고 대회를 중지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8월 31일 목포지역 각 단체가 연합위원회를 개최하고 ‘목포경찰서폭행대책강구 무목사회단체연합회’를 결성했는데 장병준은 신간회 조사부 간사로 이 연합회 실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어 11월에는 일본 노동농민당과 신간회 도쿄 지회 관계자들의 하의도 농민들의 토지 회수 투쟁 지원 방문을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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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2월 신간회 목포지회 제1회 정기대회는 100여명의 회원과 300명의 방청객들이 참가한 성황 속에 목포극장에서 열렸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 회원의 자격 문제를 두고 목포지회에서 내분이 발생했다. 이 내분은 조극환과 서병인이라는 두 사회주의자 간의 갈등은 목포 지역 사회 운동권 전체를 양분하는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장병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5인의 전형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이후 내분의 수습과 활동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다.


1928년 장병준은 신간회 목포지회의 총무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29년에는 신간회 복대표대회(複代表大會)에 참가했다. 1928년, 1929년 연속으로 지회 대표가 참가하는 정기대회를 금지당한 신간회가, 규약과 임원을 개선하기 위해 몇 개의 인접 지회가 합동으로 대표를 선정하고 이들 복대표들이 모여 정기대회를 여는 방안을 만들어내었다. 1928년 6월 28~29일 열린 이 대회를 복대표대회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신간회는 임원진을 개선하고 지회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새로운 규약을 채택했다. 이후 신간회의 활동방향을 결정한 중요한 대회였으니 구역 대표의 중요성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목포지회, 장흥지회, 강진지회, 완도지회가 합동하여 목포구를 형성했는데, 장병준은 이 목포구의 대표였다. 복대표대회는 6월 29일 각 도마다 한 사람의 전형위원을 선출하고 이들이 중앙집행위원과 중앙검사위원을 선출하도록 했다. 장병준은 이 13인의 전형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집행부의 조직에 참여했다.


신간회 목포지회는 1930년 제3회 정기대회를 개최했는데, 장병준은 이 대회에서도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전남 지역 신간회 운동에서 장병준이 차지했던 비중을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난다. 1930년 2월 26일 위원장 김시중을 비롯한 신간회 장성지회의 간부들이 일본경찰에 의해 대규모로 체포되었다. 이어 목포, 나주, 곡성, 순천 등에서 신간회 간부들이 연이어 체포되었는데, 장병준은 목포의 중심인물로 잡혀 들어갔다. 별다른 죄목을 만들지 못하는 바람에 3월 6~7일에 모두 석방되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장병준이 지역 운동의 중심으로 일본경찰의 주목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러나 신간회가 해소되자 더 이상 민족운동을 지속할 조직적 기반을 찾지 못했던 장병준은 1931년 이후 해방까지 두드러진 민족운동을 전개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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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장병준도 1946년 한민당 광주지부장, 전남도당 위원장 등을 맡는 등 정치 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미 운동 일선에 나설 연배는 아니었으며, 그 동안 정치활동에 적극적이지 않던 둘째 동생 장병상이나 아나키즘 운동에 뛰어들었던 장홍염이 우익에 가담하여 적극적인 정치 활동에 나섰다. 장홍염은 1948년 제헌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무안 을구의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2대까지 연속 선출되었다.


일부 증언에 따르면 장병준이 무안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전문 연구에서는 그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장병준도 1946년부터 시작된 반탁운동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원래 좌익인사들과 교류가 많았고 사위들이 좌익에 참가했던 터라 극단적인 좌․우 대결의 정국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지는 없었던 듯하다.


장병준이 정치 활동에 다시 열정을 보인 것은 이승만 독재가 기승을 부리면서부터였다. 1959년 민주당 전라남도당 위원장에 선임된 그는 1960년 3.15 부정 선거 규탄 시위에 노구를 이끌고 직접 앞장 서는 등 민주화와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1960년 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 선거에 다시 뛰어들었던 것은, 4월 혁명 이후 정치 정세의 변화 속에서 자신이 지향했던 통합적이고 개혁적인 정치가 가능할 것이라 판단해서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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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실 정치의 벽은 높았고, 1961년 참의원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다시 정치판에 나서지 않았던 장병준이 1972년 3월 16일 세상을 떠나자, 대한광복회 전남지부가 중심이 되어 ‘고 포양 장병준 선생 사회장의위원회’를 조직했다.


3월 20일 광주시민회관에서 열린 사회장에는 당시 전남도지사, 전남도 교육감, 광주시장과 광복회 전남지회 회원들과 많은 시민 학생들이 참여했다. 군악대가 조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민족운동의 원로는 금남로를 지나 영면의 길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