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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국민대표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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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준이 고향 장산도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킨 것은 비교적 이른 시점인 1919년 3월 18일이었다. 광주에서 최초의 시위가 3월 10일에 일어난 것이나 영암이나 목포에서 모두 시위가 4월에 일어났던 것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시위, 조직적인 준비와 도피, 이후의 지속적인 운동 참여 등 3·1운동 전후의 행적으로 보아 장병준은 운동의 소식을 듣고 결행했던 것이 아니라, 사전에 운동을 준비하는 그룹에 속해 있거나 초기에 운동에 참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3월 18일 오전 10시 장병준은 장산도 주민 수십명을 대리 마을 사정(射亭)에 모아 놓고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서울에서 만세 시위 소식을 전하면서 만세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대열을 이끌고 주변 마을들을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날 오후 2시까지 만세 시위를 벌린 장병준은 김극태, 고제빈 등 주도자들과 함께 바로 섬을 떠나 도피에 들어갔다.

목포경찰서장은 3월 20일 벌써 장병준을 주모자로 지목하고 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에 들어갔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의 수배 내용이다. 사진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인상착의로만 수배할 수밖에 없었는데, 장병준을 “안색은 희고 비만한 편, 둥근 얼굴, 큰 눈, 머리 모양은 하이칼라형으로 가리마를 타고 기타 특징은 없음” 이라고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고 강한 인상을 지녔던 장병준의 실제 외모와는 완전히 다르게 수배 전단이 작성되었던 것은, 장산도의 주민들이 합심하여 일제 경찰에게 거짓 정보를 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장산도 만세시위 주도들은 3월 23일까지 대전역까지 동행했다. 그러나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가려던 나머지 일행들은 사정이 여의치 않자 목포로 귀환했고, 장병준은 대전역에서 일행과 헤어져 서울로 간다. 3월 18일의 시위, 치밀한 도피와 서울행, 그리고 서울에서 이후의 활동과 상해로 망명 등은 장병준이 사전에 이미 많은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목포로 돌아갔던 김극태, 고제빈은 곧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 와중에 장산도 주민 김영철(金榮澈)이 엉뚱하게 연루되었다. 김영철은 3월 15일 소금을 사기 위해 목포에 나왔다가 20일 장산도로 돌아갔던 터라 시위 참여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경찰의 가혹한 고문에 참여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재판에 와서야 “너무나 엄중한 신문”이었기 때문에 거짓으로 자백했다고 진술했다. 당시 일본 경찰의 수사가 얼마나 거칠고 야만적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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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올라간 장병준은 이후 한성정부를 수립하는 대한국민대회 조직에 참여하게 된다. 장병준 스스로는 이 사실을 감추었지만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투쟁을 함께 주도했던 이동욱의 진술에서 나타난다. 이동욱은 어떻게 장병준을 알게 되었냐는 일제 경찰의 질문에 “1919년 4월 23일 대한국민대회라는 것이 조직되었을 때에 자신은 대표의 일원이었고, 장병준은 대표는 아니었지만 간부 중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 ‘대한국민대회’는 3.1 운동 직후 이규갑, 홍면희, 한남수, 김사국 등이 준비하여 4월 23일 13도 대표자 24인 모여 ‘한성정부’ 수립을 선언한 모임으로 흔히 ‘국민대회’라고 한다. 4월 23일의 국민대회 자체는 그렇게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여기에서 선포된 ‘한성정부’는 이후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가 통합하여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할 때 그 기반이 된 것으로서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이동욱은 이 국민대회의 13도 대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국민대회를 실질적으로 조직했던 것은 1907~8년 보성학교를 다녔던 김사국이었다. 김사국은 보성전문 출신으로 3.1 운동 당시 학생 시위를 이끌었던 주익(朱翼)과 함께 국민대회와 대규모 만세 시위를 시도했는데, 여기에 다수의 보성고보, 또는 보성전문학교 출신 청년들이 참여했다.

그런데 이 무렵 이미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던 그룹 중의 한 사람이던 이춘숙(李春塾)은 서울에서 국민대회 준비 그룹과 함께 통합 논의를 긴밀히 전개하고 있었다. 이춘숙은 장병준의 보성전문학교 선배로 1918년 일본 中央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였으니 비슷한 시기에 서울과 도쿄 유학생활을 함께 했던 터였다. 이후 임시정부에서도 장병준은 이춘숙, 홍진의(홍도 洪濤), 한위건 등 함경도 출신의 유학생 그룹과 행동을 같이 하게 되는데, 이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은 이후 장병준이 1920년대 송내호 등 사회주의자들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며 신간회와 같은 좌우 연합의 민족통일전선에 적극 참여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춘숙, 홍도, 장병준, 한위건 등은 임시의정원에서 러시아령에서 조직된 국민의회와 통합도 주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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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이전 보성학교 출신으로 이루어진 청년 학생 그룹들이 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미 장병준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장병준은 아마도 3월 1일의 만세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고향으로 내려가 3월 18일의 시위를 주도한 다음, 다시 서울로 상경하여 국민대회 준비 그룹에 합류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동욱이 장병준을 ‘간부’라 했던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4월 23일 국민대회까지 장병준이 국내에 계속 잔류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춘숙이 국민대회 직전까지 국내에 있다 상하이로 돌아와서 4월 23일 제2회 회기 중 “국내의 국민대회에 대해 임시의정원이 성립된 것을 발포하자”는 동의를 제출했던 것으로 보아 국민대회 개최 이전에 서울을 떠났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