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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양 장병준 약전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한 민족운동가


여기 우리 곁으로 한 민족운동가가 돌아온다.  포양 장병준(張柄俊)이다. 선생의 파란만장하고 역동적인 삶은 오랫동안 잊혀져있었다. 겸손한 성품과 어려운 시대 배경 탓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직 보호를 위해 자신의 활동을 거의 드러내지 않은 채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해방 이후에도 독립운동 전력을 과시해 이득을 취하거나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이런 강직함 때문에 선생의 일생은 주목받지 못했다.  이제 그 복원이 시작됐다.

 포양 장병준은 1893년 목포 서남쪽 약 40km 되는 곳에 자리한 작은 섬 전라남도 신안군 장산도에서 태어났다.  인동 장씨 가문은 장산도의 간척사업을 이끌 만큼 개척 의지가 강했고 교육열이 높았다.  장병준은 신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부친 장진섭(張鎭燮)의 4형제 중 맏아들이었다.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던 장병준은 목포에서 공부한 후 서울로 올라가 천도교 계열의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니혼(日本) 대학 법학과를 다녔다.  보성학교에서 일군 인맥은 이후 장병준의 항일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17년 일본에서 귀국한 장병준은 여러 선후배동지들과 교류하며 민족운동의 방향과 진로를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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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장병준은 목포, 무안지역에서 3.1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한 조직활동을 활발히 하는 한편 3월 18일 장산도에서 선도적 만세 시위를 조직한다.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서울로 올라간 선생은 1919년 4월 23일 조직된 대한국민대회 조직에 참여해 이후 수립된 한성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한성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의 기반이 된 역사적 모임이었다.  선생은 곧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전라도 대표 의원으로 선출된다.  장병준은 그 시기 상해임시정부의 최대과제였던 독립운동의 단일대오 형성을 위해 북간도와 연해주에 산재되어 있던 독립운동세력을 통합시키는 임무를 맡아 수행했다.


이로부터 선생은 ‘장현숙’이란 가명으로 북간도, 연해주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 조직을 통합하는 일에 주력하며 자금모집, 선전물의 우송과 배포, 조직원 포섭 등의 비밀활동을 해나갔다.  또한 목포, 무안, 완도, 강진, 해남의운동가들과 접촉하였는데 이들은 이후 3.1운동 1주년 기념투쟁과 신간회 결성까지 이어지는 목포지역 일대의 민족운동핵심 맥이 되었다.


선생은 1920년 3월 1일을 대한독립 1주년 기념일로 정하고 이를 위한 투쟁을 준비했다. 

‘대한독립 1주년 축하경고문(祝賀警告文)’ 등 문건과 유인물을 만들고 휴교와 철시, 축하대회 참여 등을 권유했다.  선생은 1920년 3월 11일 일경에 체포된다.  선생은 쇄골이 부러지는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임정요인으로서 본인의 신분과 조직원들을 발설하지 않았으며 박현숙이란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일제당국의 수사를 교란시켰고, 이로 인해 일경이 취조를 포기하는 사태에까지 이르러 최소한의 죄명으로 기소되어, 3년형을 받고 1922년 6월 가석방될 때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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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된 장병준은 목포에 내려가 송내호 등과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전라도 일원의 동지들을 규합하였는데 그 결실이 1927년 6월 신간회 목포지회 결성이었다.  신간회는 좌와 우를 망라한 민족 통일 전선이었다. 지역 민족운동가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텁고, 초기 임시 정부 통합 운동 현장에서 활동했던 선생은 신간회 목포 지회의 결성과 활동의 중심으로 1930년 신간회 복대표를 맡아 전국회의에 참여한다.  1930년 신간회 간부들에 대한 체포 시 장병준이 목포 중심인물로 잡혀 들어간 사건은 전남 지역 신간회 운동에서 선생이 차지한 비중을 짐작하게 한다.


일제의 본격적인 중국 대륙 침략과 국내외 독립운동에 대한 대대적입 탄압으로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좌절하고 변절하였다.  선생은 고향 장산에 은거하면서 민족해방의 확신을 버리지 않고 동지들과의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해방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조선과도입법의원, 한민당 광주지부장 등을 맡았다. 


선생이 다시 정치 활동에 열정을 보인 계기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였다. 1959년 민주당 전라남도당위원장에 선임된 선생은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노구를 이끌고 앞장서는 등 민주화와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0년 4월 혁명 이후 정치 정세의 변화 속에서 선생은 자신이 지향했던 통합적이고 개혁적인 정치가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가졌으나 결실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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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고루 잘 사는 세상, 민족의 기상이 세계만방에 드높은 시대를 꿈꿨던 선생은 그 날을 염원하다 1972년 3월 16일 타계했다. 고인을 향한 지역사회와 주민들의 존경과 애도의 물결속에 3월 20일 광주시민회관에서 열린 사회장에는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참여해 선생의 가시는 길에 함께 했다.  그의 나라사랑을 기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2006년 장산에서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 419호에 안장되었다.


일제강점기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민족 운동가였던 포양 장병준의 일생은 19세기 말 장산도라는 작은 섬에서 출발해 20세기 초반 동아시아 전역을 누비며 한겨레의 미래를 밝게 비추는 등불이 되었다. ‘바다를 품는다’는 선생의 호 그대로 바다보다 크고 넓은 고인의 정신을 오늘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