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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주년 기념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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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 활동은 국내 요인의 망명, 선전활동과 함께 제2차 독립시위운동을 벌이는 것을 주요한 목표로 삼았다. 1919년 8~9월 다수의 특파원들이 국내에 잠입했고 조선민족대동단, 대한독립애국단, 대한민국청년외교단과 연계하여 만세 운동을 다수 일으키려 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에 1920년 3월 1일 일주년이 다가오면서 이것을 기회로 다시 대규모 투쟁을 불러일으키려는 임시정부 등 민족운동 진영과 일제 경찰 간의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1920년 3월 1일 당일에는 서울에서 배화여학교, 진명여학교, 기독교 부인성서학교 학생들이 교내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고 평양과 신천, 숙천 등지에서 만세 시위가 소규모 일어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일제 경찰이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터라 대규모 운동으로 확대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3.1운동의 대중적 투쟁을 확산시키려는 노력 자체는 매우 중요한 시도였다.


장병준, 박기영, 이동욱 등 대한국민회 지도부는 1920년 3월 1일을 대한독립1주년 기념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한 투쟁을 준비했다. 1919년 말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1920년 2월 본격적으로 문건을 만들고 조직망을 연결했다. 우선 임시정부의 문건 등을 토대로 세 사람이 협의하여 「大韓獨立一週年祝賀警告文」 등 유인물을 작성했다. 1920년 2월 26일자로 대한국민회가 전국의 학생청년과 상업가 일동에게 1920년 3월 1일을 맞이하여 휴교와 철시, 그리고 축하대회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대한독립일주년축하경고문」, 「대한독립일주년축하철시경고문」 이라는 문건을 작성했으며 1920년 2월 27일자로 혈성단(血誠團) 명의로 3월 1~2일 휴교를 촉구하는 문건, 2월 28일자로 대한민국 국민대회 결사단 명의로 「혈루를 흘리자」라는 문건, 그리고 이를 총괄하는 선언문 형식의 1920년 3월 1일자 「대한독립일주년축하경고문」이 대한국민회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이 중에 3월 1일자 「대한독립일주년축하경고문」이 주로 배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고문」들은 대체로 3.1운동 당시 기미독립선언서의 핵심적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들은 1920년 3월 1일은 건국의 기념일이라 정의하고, “대한의 자유독립을 선언한 이래 일주년 되는 첫 생일로 민족이 영원히 기념할 축일 ”이니 이천만 동포는 민족의 자유와 민족의 정신을 세계에 선포하고 절규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학생들은 3월 1일부터 2일까지 휴교할 것이며 상인들은 철시하고 축하 집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투쟁을 함께 하지 않는 자는 이천만 동포의 일원이 아니니 철시하지 않는 상인에게는 보복이 있을 것이라 하기도 했다. 투쟁은 태극기를 게양하고 축하집회를 열고 만세를 부르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진행할 것이니 이런 “문명적, 정의적 행동”을 세계 여론이 “유사 이래 미증유의 문명전”으로 본다는 것이었다. 학생과 상인 등 도시 시민을 중심으로 하여 대규모 대중 시위를 재현함으로써 정의, 인도의 시대에 적합한 문명 민족의 가치를 발휘하겠다는 것이었다.


경고문들이 만들어지자 기도교부인성서학교에 근무하고 있던 이동욱이 유인물의 인쇄를 맡았고 장병준이 자금을 지원했다. 서울 지역의 배포는 이동욱과 박기영이 나누어 맡았으며 대전, 대구, 마산, 목포 등 전국 각지에 배포하는 것은 서로 협력하여 진행했다. 대전에는 이동욱의 조직이, 목포는 장병준이 자신의 조직을 동원했고, 대구와 마산은 대한국민회의 다른 조직이 담당하되 전체적인 연락은 박기영의 조직이 맡았다.


우선 이동욱은 근무하고 있던 학교의 등사기로 수백부를 찍어내었으나 전국에 걸쳐 살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장병준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이동욱은 인쇄공인 유진상 형제와 함께 활판 인쇄까지 준비하여 대량의 유인물을 제작했다. 1920년 2월 27일 우선 서울의 각 학교와 가정에 「大韓獨立一週年祝賀警告文」 등 유인물을 살포했고, 이날 지방으로 배포도 시도했다. 박기영이 집안 누나인 박자선(朴慈善)에게 신문지로 포장된 「大韓獨立一週年祝賀警告文」 등 유인물과 이동욱이 이길용에게 보내는 명함을 건넸다. 박자선은 다음날인 28일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서 내려 역무원으로 근무하던 이길용에게 일부를 전달했다. 이길용은 다음날인 2월 29일 최성운, 한부에게 부탁해 대전역과 대전장에서 유인물을 살포하도록 했다.


이날 다시 기차를 타고 대구로 내려간 박자선은 대구에서 전달할 사람을 찾지 못하자, 다음날인 29일 마산으로 가서 나머지 유인물을 팽동주에게 전달했다. 팽동주는 마산에서 창신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과 마산 지역 3.1운동에 참가했던 자산 안확을 통해 대한국민회 조직과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장병준은 자신이 조직한 도서 지역 조직을 통해 목포에서 투쟁을 전개하려 했다. 2월 26일 서울에 올라와 있던 표성천에게 태극기 2장과 「대한독립일주년기념경고문」 200장 정도를 넘겨주었고, 표성천은 27일 목포로 내려와 다음날 서태석을 만난 후 유인물과 태극기를 넘겨주었다. 서태석은 2월 29일 여인숙 주인 김운재에게 이웃집에 유인물을 뿌리도록 하는 한편, 이날 저녁 직접 외투를 입었다 벗었다 하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유인물을 시내 곳곳에 뿌렸다. 또 자정 무렵에는 경찰의 눈을 피해 목포역과 송정 공원 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하는데 성공했다.


일본 경찰이 워낙 긴장한 채로 주목하고 있었던 터라 서울의 대한국민회의 구성원들은 3월 1일까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유인물을 살포하는 족족 체포되었다. 1920년 2월 29일 이동욱, 박기영이 모두 체포되었고 인쇄와 배포를 담당했던 사람들도 거의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왕에 체포된 이후에도 조직과 임시정부와 연락망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조직의 핵심인 박기영, 이동욱, 장병준은 체포되면 국내 조직의 핵심인 박기영을 보호하기로 사전에 협의했던 듯하다. 이동욱도 자신과 장기영이 협력하여 문건의 작성과 배포를 맡았다고 주장하며 한번도 박기영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이후 체포된 사람들도 박자선을 제외하고는 박기영의 역할을 거론하지 않았다. 게다가 2월 29일 처음 체포된 이동욱, 박기영 등은 경기도 경찰 제3부가 수사를 맡았고 대전과 마산에서 배포를 담당한 박자선, 이길용, 팽동주는 종로경찰서에서 수사를 맡았으며, 가장 나중에 체포된 장병준, 표성천, 서태석 등은 목포경찰서에서 수사를 맡게 되면서 일본 경찰이 사건의 전모를 다 파악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박기영도 박자선의 집에 유숙하고 있다 2월 29일 아침에 경찰에 체포 연행되었다. 그러나 박종모라는 이름을 대고 일본 경찰의 수사를 피해갔다. 박기영은 천도교 남원 교구의 중심인물로 1919년 4월말 교구에서 특별성미금을 걷어 중앙총부에 납입하는 등 중앙과 연락을 담당하고 있었다. 일제 경찰이 3천도교 자금 조달과정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으나 이미 그는 1919년 4월 21일경부터 피신하여 원래 살고 있던 남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아예 이 무렵부터 박기영이 박종모로 행세하고 다녔을 가능성이 높다. 박자선을 수사한 종로경찰서는 박종모가 박기영이라는 이름을 쓴다는 사실을 알아냈으나, 이미 박기영이 석방된 이후였다.


더구나 사건의 핵심인 장병준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할 무렵까지도 체포되지 않고 있았다. 그는 원래 자신의 하숙집을 경찰이 급습했을 때도 피했고 3월 5일 동생 장병상의 하숙에서 장병상이 잡혀갈 때도 피신에 성공했다. 이 기간 동안 기존 조직원들을 피신시키고 스스로도 경찰 수사에 대응할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20년 3월 13일 경기도 경찰부가 이동욱, 박기영 등 유인물의 인쇄, 배포를 맡았던 그룹에 대한 처리를 결정할 때, 이동욱 장병준은 확실한 주모자로 처리되었으나 박종모로 행세한 박기영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서울, 대전, 마산, 대구, 목포 등 전국으로 확산되어 있는 조직과 투쟁 양상 때문에 일제 경찰과 검찰은 사건의 주모자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박기영이 빠져나갔으므로 더욱 혼란스러워졌겠지만 일제는 처음부터 3·1운동 기소중지자로 끝까지 체포되지 않고 있던 장병준을 임시정부와 연락책이고 주모자로 의심하고 있었다.


비교적 늦게 체포되었던 장병준은, 최대한 임시정부와 관련을 감추면서 아직까지 발각되지 않고 있던 나머지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일본 경찰을 혼란시키기 위해 전주 출신 박현숙(朴玹淑)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웠다. 이 박현숙은 장병준 자신과 박기영을 섞어 놓은 인물이었다. 장병준은 박기영의 이름을 언급조차 하지 않으면서 임시정부와 연락을 담당한 것이 박현숙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현숙은 장병준 자신이 국내에 들어와 활동할 때 사용한 가명이었고, 전주를 근거지로 하는 박씨라는 점, 그리고 조직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박기영의 역할이었으니, 이 두 가지를 합친 박기영이라는 가상인물 덕분에 일제 경찰은 끝내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일제 경찰도 장병준의 진술을 믿지 않고 온갖 고문을 가했으나 장병준은 끝까지 버텼다. 결국 장병준은 임시정부에 연결된 박현숙의 지시를 받아 거사를 추진한 것으로 기소되어 1922년 6월 가석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한편 피신에 성공한 박기영은 고향인 전주와 남원에서 대한국민회 조직을 더욱 확대하며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는 등 고향인 전주 순천 등지에서 활동을 지속하다 1922년 2월 체포되었다. 1922년 속개된 재판에서 1920년의 3.1운동 1주년 기념 투쟁과 임시정부와 연락 담당으로 장병준의 이름이 다시 언급되었으나, 정작 사건 당시 체포되었던 인물들은 대부분 형을 마치고 석방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