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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양 장병준 가계와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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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도는 목포 서남쪽 약 40km 정도되는 곳에 있는 신안군의 크지 않은 섬이다. 면적은 29.4㎢ 정도며 현재 인구는 2,000명이 채 되지 않는다. 포양(包洋) 장병준(張柄俊)은 1893년 이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동아시아 전역을 넘나들며 근대의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였고 민족 운동의 중요한 장면마다 족적을 남겼다.

목포와 서울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도쿄에 유학했던 그는, 지역의 3. 1운동을 주도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했다. 이후 만주와 연해주, 국내를 넘나들며 항일 운동을 벌이며 옥고를 겪었다.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그는 신간회 지회의 중심인물로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그의 막내 동생인 장홍염도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했고 중국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에 헌신하다 옥고를 치룬 보기 드문 형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장병준의 고향이며 민족운동의 근거가 되었던 신안군 장산도는 일찍부터 주변의 하의도와 함께 행정구역을 구성했으며 주변 도서 지역과 바다를 통행하는 교통로의 요지였다. 백제 시대의 거지산현(居知山縣), 통일신라의 안파현(安波縣)이었으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인돌과 산성 유적들은 고대로부터 이 지역의 중요성을 입증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장산(長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나주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말 왜구가 창궐하자 나주로 주민들을 이주하고 섬을 비웠다.

그러나 조선 전기부터 소수의 주민들이 섬으로 찾아 들었으며 17세기 이후 본격적인 입도가 시작되었다. 인동 장씨의 입도조(入島祖)인 장인걸(張仁傑)은 함평, 해남, 가사도를 거쳐 1768~1798년 사이에 섬에 들어와 대리 마을에 정착했다. 1750년경 제작된 <해동지도>를 보면 붉은 점선으로 주요 교통로를 표시하고 있는데, 장산도 주변에 조운로들이 통과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섬이지만 고립되거나 격리된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과 바다를 통해 소통할 수 있는 경로 위에 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산도에 정착한 인동 장씨 가문은 장병준의 할아버지인 장도규 대에 이미 상당한 지주로 알려져 있었지만, 장도규의 아들 형제들이 주변 도서 지역이 간척사업을 주도하면서 대지주로 성장했다. 장씨 가문이 주도한 장산도의 간척사업은 1910년 이전에 거의 마무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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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 가문은 장도규부터 교육열이 높았고, 특히 장병준의 부친 장진섭((張鎭燮)은 신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장진섭은 아들 4형제를 두었고, 장병준이 큰 아들이었다. 장진섭은 그리 많은 토지를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자제들을 목포와 서울, 일본까지 유학을 보내어 새로운 근대학문을 익히게 했다.


큰 아들 장병준은 물론이고 둘째인 장병상과 셋째 장홍염도 각각 경성에서 사립 중동고보와 휘문고보에 유학을 보냈다.

장병준은 한학을 공부하다 목포에서 공부한 후 서울로 올라가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니혼(日本)대학 법학과를 다녔다. 당시 천도교가 운영하던 보성학교의 인맥은 이후 장병준의 항일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또 일본 유학 중에도 보성학교 출신으로 중앙대학 법과에 재학 중이던 이춘숙과 절친한 사이였다. 장병준은 1917년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드러난 활동은 없었으나 지역의 유력한 인사들과 교류하며 민족운동의 방향과 진로를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