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임시의정원 의원과 비밀 활동

fghgfhgffff.png

상하이에 도착한 시점은 불분명하지만, 장병준은 1919년 4월 30일부터 5월 13일까지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4회 회의에서 한남수(韓南洙), 김철(金徹)과 함께 전라도 대표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4회 회기에 처음으로 임명된 장병준의 이름은, 곧 회기 중 해임된 의원 명단에도 나타난다. 선출되자마자 해임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장병준 본인이 공개적으로 이 기간 동안의 활동에 대해 수사기관에서 자백하거나 이후 회고한 적이 없으므로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추론할 수밖에 없다.


첫째는 회기 마지막 날 손두환, 한위건, 장도정, 임봉래, 홍도와 함께 장병준이 제출한 상해 임시의정원과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와 통합을 촉구한 결의안이다. 이 안은 “타지에 성립된 국민의회에 대하여 정부로 하여금 삼일 이내로 파원 조사한 후에 사안을 의정원에 제출”하도록 했다. 


1919년 5월 경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가장 큰 과제는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를 비롯한 해외 각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명실상부한 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었다. 이 논의는 상하이에서 안창호와 원세훈 사이에 진행되지만 많은 단체들과 연락을 비밀리에 실제로 수행할 운동자가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이춘숙, 홍진 등은 이미 1918년 러시아의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문창범을 방문하여 운동 노선에 관해 논의할 정도로 신뢰를 쌓고 있었으므로 이춘숙, 홍진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 결의안을 함께 제출했던 장병준이야말로 임시정부가 파견할 조사원으로 적임자였을 것이다. 이런 비밀 임무를 수행하기 전, 임시정부의 공식적인 지위로 그에게 주어진 것이 임시의정원 의원이었을 것이고, 연락 임무를 수행하면서 상하이를 떠나게 되니 자연스럽게 의원직에서 해임시켰던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장병준이 1919년 가을 따렌(大連)에서 민정서에 체포된 것도 바로 이런 연락 업무를 수행하던 과정의 일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단서는 1972년 장병준의 장례식 당시 독립운동 동지들의 조사에서 장병준이 “남북 만주와 시베리아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을 설득하여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만주, 연해주 일대의 단체를 찾아다니며 지도자들을 만났다는 구절이다. 장병준은 1919년 이전과, 1920년 이후에는 만주에서 활동한 적이 없으므로, 1919년 5월 이후부터 다시 국내에 등장하는 1920년 사이에 그는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앞서 결의안이 제안한 ‘파원조사’의 임무와 일치한다.


또 장병준은 이후 살펴볼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 투쟁 당시 혈성단, 대한국민회 등의 명의로 유인물을 제작했다. 대한국민회는 1919년 7~8월경 서울에서 실제 조직된 단체지만, 장병준이 이들 단체를 방문하고서 국내 조직에서도 그 이름을 함께 사용했을 가능성도 높다. 특히 간도의 대한국민회는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의 간도 지부와 같은 기능을 수행했고, 이 두 단체가 각각 연해주와 간도에서 맹렬히 활동하였으며 1919년 말에 임시정부 산하로 포섭되는 독립운동 기관들이라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장병준은 1919년 5월부터 상하이와 만주, 연해주, 국내를 오가는 비밀 연락 임무를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임시정부는 국내에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연통제를 실시하고 교통국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세워진 것이 1919년 7월과 8월이었다. 또 임시정부 내무부에서 특수임무를 부여한 특파원을 보내기도 했는데 이 또한 1919년 7월부터 실시되었다. 즉 1919년 7월 이전에는 국내 연락을 담당할 임시정부의 전담 기구나 조직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장병준이 국내와 상하이를 오가며 독립운동 조직을 결성했던 것은 1920년 이후의 일제 자료에도 나타난다. 임시의정원 의원 신분인 장병준은 만주와 연해주는 물론, 국내에도 출입하며 연락과 조직을 담당했다. 1919년 여름 서울에서 만들어진 대한국민회가 그 결과였다. 장병준은 앞서 언급했던 이동욱, 그리고 박기영(朴琪永)과 함께 서울에서 대한국민회를 조직했다. 이 대한국민회는 1920년 2월말 3.1운동 1주년을 맞이한 전국적 규모의 시위를 준비하다 장병준과 이동욱은 체포되었으나 박기영은 살아남아 근거지인 전주로 내려가 활동을 계속했다.


전주를 중심으로 임시정부와 연결하여 대한국민회 활동을 계속하던 박기영은 1922년 2월 체포되었는데, 일제의 판결문에 따르면 박기영은 1919년 8월 서울에서 이충모(李忠模)·김형준(金炯俊)·양재명(楊在明) 등과 함께 ‘대한국민회’를 조직 서울을 근거지로 활동하며 이량, 이동욱 등을 부장으로 영입하고 동지 장병준(張炳俊)을 상해 임시정부로 파견했다고 한다.


장병준을 통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며, 각종 ‘불온문서’들을 들여와 배포하며 투쟁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박기영은 보성학교를 졸업하고 천도교 남원교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장병준과 이전부터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대한국민회는 그 이전부터 박기영, 이동욱, 장병준이 협력하여 조직하고 임시정부의 지도 아래 항일 운동을 전개하는 연합조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동욱이 1919년 7월 이길용에게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 입회를 권유하면서 입단서약서와 규약 등을 전해주었다는 진술은 이런 사정을 보여준다. 이동욱은 이길용 외에도 박성환(朴聖煥)을 포섭하였고, 이들은 “장사”는 곧 “독립운동”을 뜻한다는 암호까지 정하였다.

IE001954115_STD.jpg


또 장병준도 대한국민회와 임시정부 사이의 연락, 선전물의 우송과 배포 등을 맡았을 것이지만 독자적인 포섭과 조직 활동도 계속했다. 우선 서울에서 보성학교 동창들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1919년 8월 장병준은 서울에서 보성학교 후배 김홍기(金鴻基)를 알게 되었는데 그에게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과 신한청년회 기관지 신한청년을 주고 읽어 보라고 권하였으며 자신이 임시정부 군무차장이던 이춘숙과 연락하고 있다고 하여 은연 중 임시정부에서 나왔음을 암시했다. 김홍기 외에도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투옥 중이던 최린의 아들 최혁 등도 장병준의 접촉대상이었다.


그러나 장병준의 확실한 조직 대상은 고향 부근의 섬사람들이었다. 그는 원래 알고 지내던 장산도 주변 섬의 천도교 계열의 인물들과 접촉했다. 표성천(表聲天)과 서태석(徐邰晳)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며, 이들은 이후 오늘날 신안군 도서 지역 민족운동의 핵심이 된다. 표성천은 자은도 출신이며 서태석은 암태도 출신이다. 이들은 대표적인 친일 종교단체인 제우교 신자였을 뿐 아니라, 만주에서 가장 두드러진 친일단체였던 보민회사의 설립 구성원이며 대표이기도 했다. 또 서태석은 1919년 11월까지 암태면장을 지내고 있었다. 항일운동은 커녕 친일적인 행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이후 살펴볼 1920년 대한독립일주년기념투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다 체포되었다. 이들은 경찰 조사에서 만주 제우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독립단원들과도 타협해야 한다고 생각한데다 원래 잘 알던 처지라 장병준의 부탁을 어쩔 수 없이 들어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2장의 태극기와 수백장의 유인물을 몰래 전한 표성천이나 남몰래 목포 시내 곳곳에 유인물을 뿌리고 역과 공원에 태극기까지 게양한 서태석의 행적을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장병준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1917년 무렵부터 표성천과 친밀한 관계였으며, 목포와 서울에서 자주 만났다. 1920년 체포된 이후 표성천은 장병준을 보호하기 위해 동생 장병상으로부터 유인물을 받았다고 거짓 진술하기까지 하는데, 이는 이들이 상당히 조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서태석은 장병준과 밀접한 관계를 수사과정에서 계속 부정했다. 자신은 장병준은 1919년 6월 장동식의 소개로 만났을 뿐이며 장동식과 신만우의 딸 사이 결혼을 중매한 적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태석은 이 결혼을 중매한 것이 맞았고 1919년 2월 장동식의 결혼식에서도 두 사람은 객실에서 온 종일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병준이 상해 임시 정부의 비밀 파견원으로 독립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소문은 암암리에 널리 퍼져 있었다.


장병준은 국내에서는 장현숙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고 장동식의 결혼식에서도 이 가명을 사용했다. 장병준이 국내에 드나들면서, 또 표성천과 서태석이 만주로 여행하면서 이들은 자주 접촉하였고, 이 과정에서 이들을 동조자로 끌어 들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아야만 이후 자은도 소작인회 회장(표성천)과 암태소작인회장(서태석)으로 1920년대 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이들의 행적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